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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환·치료

몇 달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자기계발서 열풍이 불었습니다. 10대, 꿈을 위해 공부에 미쳐라. 20대, 공부에 미쳐라.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 40대 공부 다시 시작하라. 공부하다 죽어라. 자기계발서 5권을 나란히 펼쳐놓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힙니다. 뭘 더 그렇게 공부하란 말일까요... 이제까지 미친 듯이 달려온 당신.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뛰고 있습니다. 뒤쳐지지 않기 위해 나도 더 속력을 내야 하는데, 자꾸만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고 쓰러질 것 같아요. 스펙과 자격증의 개수가 왠지 나를 대표하는 것만 같습니다.

출퇴근 시간에 9호선을 타보면 콩나물시루같이 빽빽합니다. 그 와중에도 다들 휴대전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의미 없는 스크롤을 하느라 손이 바쁠 뿐입니다. 딱히 재미있는 것도 없지만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합니다. 집에 오면 쓰러집니다. 그래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왠지 그냥 자기는 억울합니다. 고생한 나에게 작은 보상을 주고 싶어 뭐라도 해야겠다. 야식을 시켜놓고 드라마를 봅니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습니다. 약간의 후회를 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개운치 않아 잠깐의 후회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긴장과 이완을 반복합니다. 낮에는 바짝 긴장해서 직장인 모드로 살다가, 밤이 돼서는 모든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고 쉬어줘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삶은 이완할 틈이 없습니다. 야근에, 초과근무에, 집에 가도 끝나지 않는 업무의 연장선. 누워도 일 생각이 머릿속에서 완전히 떠나질 않습니다.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아요. 처음 며칠은 잘 버팁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오래가다 보면 깨어도 깨어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눈은 뜨고 있는데, 집중이 안 돼요. 자고 싶지만 잠이 안 옵니다. 완전한 이완이 없이는 제대로 된 긴장도 없습니다.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시죠. 이렇게 과로를 하거나, 신경 쓰는 것이 많으면 몸의 에너지를 평소보다 과량으로 소모하게 됩니다. 며칠 동안 소모하는 것은 잠깐 쉬면 다시 채워지지만, 오랜 시간 비워진 에너지 탱크는 쉽게 채워지기 힘듭니다.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한의학에서는 ‘허하다’라고 표현합니다. ‘허’하다고 표현하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상태가 있습니다.

밥맛 떨어지고, 소화기능이 약해져 더부룩하고, 설사가 잦거나, 좀만 힘들면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 증상은 ‘기허’라고 합니다. 음식을 포함한 새로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일 만한 충분한 힘이 없는 거죠.

반대로 밥맛도 괜찮고 음식도 잘 먹습니다. 소화도 나쁘진 않은데, 변이 딱딱하게 나오고, 입이 바짝바짝 마릅니다. 각성은 되어 있는데, 정신이 똘망똘망하진 않습니다. 피곤해 죽겠는데 잠도 안 오는... 이런 일련의 증상을 ‘혈허’라고 합니다. 물이 말라버린 사막같이 몸이 건조하고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우리 몸은 보일러와 같습니다. ‘기’가 부족한 것은 보일러 엔진의 동력이 약해진 겁니다. ‘혈’이 부족한 것은 물탱크에 물이 부족한 것입니다. ‘기허’는 어쨌든 엔진이 덜덜거리며 작동을 하고 있습니다. 더 약해지면 아예 작동하질 않아요.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태를 ‘양허’라고 합니다. 몸을 데우는 근원이 약해진 것이지요. 반대로 ‘혈’이 부족한 상태가 오래되면 엔진이 적은 양의 물을 데우게 되어 물이 과열됩니다. 그러면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해요. 항상 나는 게 아니라 갑자기 오후에, 또는 밤에 갱년기처럼 훅 열이 납니다. 평소같이 엔진이 작동했는데, 물이 부족해서 나는 열입니다. 기와 혈이 같이 허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피곤하고 무리했다 싶으면 기력을 보충한다며 삼겹살, 소고기, 장어, 삼계탕 등의 보양식을 찾습니다. 음식 중에는 기를 보충하는 음식이 있고, 혈을 보충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보양’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보양식은 ‘기, 특히 ‘양기’를 불어넣는 음식입니다.

현대인들, 직장인들이 말하는 피곤함은 ‘기허’보단 ‘혈허’나 ‘음허’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육체노동보단 정신노동으로 인한 허증이 많습니다. 다들 피곤하다고 기운없어 죽겠다고 얘기하면서 치킨 시켜먹고, 맥주도 벌컥벌컥 잘 마십니다. 진짜 기허한 사람은 밥 한 그릇 제대로 먹기도 힘듭니다. 이건 기가 부족한 증상이 아닙니다. 혈이나 음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증상인 것입니다. 보양식을 먹으면 에너지 드링크를 먹은 듯, ‘반짝’ 힘이 납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해요. 안 그래도 물이 부족한데 불을 더 때는 격이에요. 물은 더 졸아붙습니다.

‘양, 기’는 교감신경, ‘음, 혈’은 부교감신경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술도, 커피도, 보양식도 교감신경을 흥분시킵니다. 교감신경은 긴장하는 신경입니다. 음혈이라는 에너지원을 태워가면서 엔진을 과하게 돌립니다. 과하게 가열된 엔진은 밤이 되어도 충분히 쉬어주질 못합니다. 딱딱하고 긴장된 곳을 풀려면 충분히 물에 적셔주어야 합니다. 음혈이 부족하면 이완되지 못합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다 보면 이완하는 방법을 잊어버립니다. 자율신경의 균형이 깨진 것입니다.

소파워 누워서 쉬고 있는 남성소파워 누워서 쉬고 있는 남성

그런데 사람들은 기가 허해서 그런 줄 알고 자꾸만 술로, 커피로, 보양식으로 안 그래도 물이 부족한 몸을 자꾸만 더 몰아붙입니다. 완전한 이완이 있어야, 제대로 된 긴장이 있습니다. 이젠 그만 좀 몰아붙이세요. 당신이 집중이 잘 안 되는 것은 긴장을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제대로 이완하지 못했기에 다시 긴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잠 좀 충분히 자고, 커피나 보양식 대신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세요. 의미없는 휴대전화 화면 내리기보단, 멍때리기가 필요합니다. 힘들다면 아예 눈을 감고 쉬어주세요. 편히 쉬는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원기옥을 쏘려면 에너지를 모아주는 시간이 필요해요. 이젠 긴장이 아니라 이완이 필요한 때입니다.

<글 = 인애한의원 (수원점) 이은 원장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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